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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1. 내 인생의 필름

잼이 JAEMYI 2022. 6. 2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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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37. 이제 22년도 절반을 지나간다.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누군가는 아무것도 안하고 지금까지 놀아버린 무경력의 백수라고 욕할 것이고, 누군가는 없는 삶을 어떻게라도 극복하고자 잠도 안자며 최선을 다했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 뜀뛰기만 한 안타까운 영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26살 군대를 전역하고 한 광고대행사 회사에 알바로 들어가 정말 밑바닥부터 잠도 안자고 열심히 일을 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출판사도 겸하고 있었고 내 목표는 출판사를 키우는 것이다 보니 정직원이 아닌 3.3%의 사업자 소득을 받으며 프리랜서로 일했다.

행사 진행 계통은 정해진 시간도 정해진 요일도 없다. 로드 행사는 앉아있을 시간도 없어 다리가 부서질 정도로 아프고 일을 시작하기 전엔 행사 준비, 일이 끝나면 철수까지 해야 된다.

그래도 나는 꿈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행사 일에 더 열중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내 일당도 꽤나 올라갔다.

그러나 본업을 키우고 싶으면 그 관련 계통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 정답처럼 행사 일에 집중할수록 출판사는 소홀해져갔다.

행사의 비율이 높아질수록 본업에 대한 업무는 낮아지고, 본업에 대한 업무를 높이고자 하면 자금에 대한 압박이 찾아왔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새벽이고 야간이고 잠도 아껴가며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일에 매달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어느 것도 하나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나만이 남게 되었다.

 

20201.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며 야외 행사가 전부 멸망한다. 당연하게도 나의 소득은 박살이 났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다른 일도 찾아보고 열심히 본업인 출판사도 키워보려 했지만 너무나도 소홀했던 결과가 한꺼번에 나를 찾아오며 바닥으로 끌어내렸고 결국 2년 동안 제대로 된 수입도 없이 발버둥만 치다 빚만 잔뜩 진 빚쟁이가 되었다.

37살이 되었을 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사업보단 취직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나는 이때 깨달았다. 제대로 된 취업 과정을 밟지 않고 살아온 모든 업보는 그 길을 가려는 순간 모조리 돌아온다는 것을 말이다.

막상 취업을 하려니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동네 형에게 물어보니 잡코리아에 이력서랑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라고 했지만 이게 맞는 건지 옳게 진행되고 있는 건지 누구하나 알려줄 이가 없었다. 어디서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부랴부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회사에 구직을 시작했지만 결과는 전부 탈락. 면접을 오라고 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최소한 면접을 봐야 내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알 수가 있는데 그런 기회조차 나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구직자의 삶을 살아보니 정말 처절함이 무엇인지 알겠더라.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 스펙도 경력도 없는 나이 많은 아저씨의 구직 생활이 너무나도 처참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살아왔는데.. 남들 다 떠나는 해외여행도, 국내여행도 제대로 맘 편히 다녀온 적도 없고 오직 일만 하고 일만 하고 일만 했는데 내가 처한 현실은 오갈 데 없는 알몸의 천둥벌거숭이라니.. 온 몸과 마음이 너무나도 시렸다.

회사 규모나 부서에 상관하지 않고 수많은 곳에 지원하니 그래도 면접을 불러주는 곳이 한 두 군데 생겨 면접을 볼 수 있었고, 면접을 볼 때마다 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의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와 수정하고 수정하니 드디어 한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구직자의 길을 걸은 지 4개월. 생활용품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취직한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이때의 나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회사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 부서마다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업무를 하는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소양이 어느 정도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취직을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취직해서 들어가는 회사가 무슨 회사인지도 모르고 들어갔으니 말 다했다.

다행히도 나를 뽑은 팀장님은 능력도 뛰어나고 좋으신 분이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인 나를 최대한 잘 가르쳐 주셨다.

나는 잡다한 기술들이 꽤나 되었다. 포토샵부터 일러스트, 편집에 이어 엑셀, 파워포인트 등등 다양한 툴을 사용한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나름 사무 업무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금방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막상 회사에 취업해 일을 하려고 하니 내가 모르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취업규칙이며 기안서, 지출결의서, 계획서, 결과보고서, 제안서, 피벗테이블, 브이룩업, 함수 등등..

법인카드는 엄마카드처럼 막 쓰고 영수증만 따로 챙겨 놨다 운영팀에 갖다 주면 되는 건줄 알았던 기존의 나와 수많은 데이터를 일일이 타이핑으로 옮기며 완성하고 칭찬받은 나. 영업은 오직 밖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 물건을 파는 건줄 알고 있던 나. 무엇을 행하기 전에 사전에 계획을 하고 보고를 하고 그날 했던 일에 대한 결과를 기록하고, 주간에 있던 일에 대해 보고하고, 월간 계획을 세우고 목표치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많은 과정들을 관리하는 것.

솔직히 이런 얘기하자면 민망한데 37살 살면서 여태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몰랐다.

 

어느 날 회사에서 주어진 업무에 허덕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 나는 직장인의 기본 소양이 안 되어 있구나..

이때부터 일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의기소침해지기 시작한 때가..

열심히 하려고 저녁에 퇴근해서도 부족한 부분에 몰두하고, 주말에도 미친 듯이 더 배웠지만 도무지 실력이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젊었으면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이 과정을 20대 중반에 제대로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나의 치열하게 산 10년의 삶이 너무나도 덧없게 느껴졌다.

아무리 못나도 내 길이 있다는 말을 이 회사에 입사하며 느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내 능력에 비해 이 회사가 너무 과분하다는 것에 절망감을 느꼈다.

내가 세상에 첫 발을 디뎌 필사적으로 부딪치며 깨달은 것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우주로 간 놈이 있으며, 뛰는 놈 아래에 걷는 놈, 기는 놈, 누워 있는 놈도 있고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는 놈들도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수많은 놈놈놈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세상이고 사회인데 나는 생각보다 그리 뛰어난 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수두룩했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은 딱히 없었다.

더욱 절망인 것은 숨이 턱턱 막혀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쉬는 날에도 밖으로 시장조사를 다니고 저녁에 퇴근하면 자기계발하고, 이 와중에 투잡을 뛰면서 언어 공부까지 하는 능력자들이 너무나도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 누구 하나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주어진 업무를 소화하는 것만도 버거운 내 자신이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 인터넷에는 그렇게 많은 월급 루팡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것이 무경력의 과거를 지닌 내가 치러야 할 값비싼 업보였다.

니 잘못이 아니다..” “소확행” “돈과 일보단 워라벨이 중요하다라는 힐링은 나에게 모두 사치에 불과했다.

내 현실은 37살의 무경력, 무자격증, 무언어점수, 무봉사활동, 말 그대로 무스펙자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결혼도 못했고 여자 친구도 없고 오직 알콜에 중독된 배나온 아저씨이자 완벽한 패배자일 뿐이랄까.

그저 한심함에 내 스스로가 절여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을 전부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이 회사에 계속 다님으로써 내 치열했던 과거와 내가 몸담았던 곳들이 모두 폄훼된다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선 이 회사를 다니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 알 수 없었을 나의 부족한 부분. 내가 앞으로 생존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 대한민국의 회사들이 어떻게 구조화 되어 있는지, 업무들은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있으며 어떻게 회사가 돌아가는지,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으니 적어도 큰 수확이라고 여겼다.

나는 몹시 의기소침해졌지만 나에 대한 자기반성과 자아성찰의 계기는 구체화 되고 확실시 되었다.

입사한지 한 달이 되기 직전, 나는 팀장님께 지금까지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 퇴사를 결정했다.

확실히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으니 다시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가자는 마음을 굳혔고 너무나도 잘해주신 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전하며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구직자가 되었다.

 

우선 취직을 하기 위해서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팀장님이 직장인이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는 통장 잔고로 얘기해야 된다고 했다. 직장인은 잔고가 마이너스거나 0이면 열심히 산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직장인들에게 돈이란 것은 한 달 열심히 회사에서 일해서 월급을 받고 최대한 아껴서 목돈을 만든다는 것이다.

프리랜서로 일을 오랫동안 해왔던 탓에 나에게 돈이란 하루 안 쉬고 일하면 번다는 장사꾼의 마인드였던 것 같다.

돈이란 언제든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는 사업가 마인드를 하루 빨리 버리고 한 달 열심히 일해서 월급을 받고 그 월급을 열심히 아껴서 목돈을 만든다는 생각부터 바꾸지 않으면 직장인으로서 회사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 번째가 바로 직장인의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아닌가 싶다.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금요일 퇴근하고 해방감을 맞는 것. 돈은 한 달 열심히 일해서 월급으로 버는 것.

워낙 프리랜서로 오래 일을 해왔던 탓에 이런 개념이 없어서 쉬어야 될 때 쉬지 못하고 열심히 해야 할 때 열심히 하지 못했다. 날씨가 좋거나 일하기가 싫을 땐 뛰쳐나가 쉬고 싶었은 이 마음을 하루 빨리 바로잡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시 직장을 잡기 전까지 최대한 직장인에 맞는 몸을 만들어야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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